mk

  • 구독신청
검색전체보기
 


독자의견    고객센터    정정보도신청    고충처리인
독자칼럼 /독자투고 / 독자앨범 보내실곳 : opinion@mk.co.kr
문의 : 여론독자부 (02) 2000-2386

신문사 안내전화 : 02)2000-2114

작성자 오순정 작성일 2017-07-06 09:40:01 추천 0 조회 109
제목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그리고 스토리에 눈감은 역사학
첨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그리고 스토리에 눈감은 역사학

호동왕자는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의 아들이다. 어느 날 고구려 남쪽으로 사냥을 나갔던 왕자는 낙랑국의 왕 최리와 마주쳤다. 최리는 이웃나라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자며 호동왕자를 궁궐로 초대하고는 낙랑공주와 결혼하라고 제안하였다. 최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왕자는 약혼녀인 낙랑공주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낙랑국에 외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소리를 내어 병사와 백성들에게 알리는 신비한 북(자명고)을 찢어버리라는 것. 그것이 나라를 배반하는 일임을 잘 아는 낙랑공주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만 결국 사랑을 선택하였다. 공주의 배신을 깨달은 최리는 딸을 처형한 다음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호동왕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호동왕자는 큰 공을 세웠지만 후비의 자식이었으니, 대무신왕의 정실부인이 간계에 휘말려 자살하고, 정실부인의 아들이 제4대 모본왕으로 등극한다.
삼국사기는 또 다른 낙랑공주이야기를 전한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18년째인 935년, 신라의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자 태조는 자신의 맏딸인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를 경순왕과 결혼시키고, 공주의 이름을 낙랑공주樂浪公主로 바꾸었다.

도종환문체부장관 취임을 계기로 고대사를 둘러싼 논란이 분분하다. 비주류는 주류사학자들을 식민사관이라 비판하고, 주류는 비주류를 유사사학이라 비난한다. 논쟁의 핵심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땅덩어리다. 그 땅덩어리의 크기는 ‘평양은 어디인가? 한사군은 어디인가?’에 달려있으니, 결국 ‘낙랑군은 어디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주류는 평양에서 발굴된 유물 등을 근거로 낙랑평양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비주류는 평양유적은 낙랑군樂浪郡이 아니라 낙랑국樂浪國(한민족이 세운 부족국가)의 것이라 비판하며 『구당서舊唐書』『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등을 근거로 낙랑요동설을 주장한다. 낙랑공주, 낙랑군, 낙랑국…. 도대체 그 ‘낙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를 보자.

현토玄菟낙랑樂浪은 무제武帝 시절에 설치되어, 조선朝鮮 예맥濊貉 구려句驪 만이蠻夷를 획일화[皆]하였다. 은殷나라의 道가 쇠衰하자, 기자箕子는 조선으로 가서 예의를 가르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지위표지[蠶]를 사냥[田]하며 노동[作]의 가치를 잠식[蠶]하게 하였다.[敎其民以禮義 田織蠶作] 조선을 ‘낙랑樂浪(풍류로 풍랑을 일으킴)’하자 백성들은 8조법금[禁八條]을 무시[犯]하였다.[樂浪朝鮮民犯禁八條](안사고는 ‘팔조는 차별화를 구비하지 못하였다’말하였다.[師古曰八條不具見])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以當時償殺]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以穀償]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소유주의 노예가 되고 여자는 몸종이 되는데, 속량하려면 50만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이상이 팔조법금의 내용인데 ‘낙랑樂浪’한 다음에는)비록 벌을 면제하여 백성을 옹호[爲]하더라도 풍속이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게 하여, 시집가고 장가듦에 짝(배필)으로 삼기를 금기[無]하였다.[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그리하여 그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않아[是以其民終不相盜] 집 문을 닫는 일이 없었고[無門戶之閉] 부인들은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한 허물이 없었다.[婦人貞信不淫辟] …이하생략…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은 기자箕子를 조선에 책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경 ‘홍범’편을 보면 기자가 무왕을 책봉하였으니, 주나라는 재야에 은거한 성인(箕子)의 이름으로 중화주의를 이식하며 소인의 나라 조선을 침탈하기 시장하였으리라. 그래서 ‘기자조선’이라는 이름이 탄생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공격하는 그들의 입장일 뿐 단군조선은 굳건히 살아있었으니, 천년 후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한사군을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낙랑樂浪’이란, 일찍이 기자의 이름으로 ‘예의禮義’를 유행시켰듯이 ‘풍류[樂]로 풍랑風浪(유행)을 일으키다’라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군자(중화주의)를 모방하며 밥 먹기 짝짓기를 밝히는 소인배(까마귀)들을 멸시하는 공작새인간으로 변신하였으니, ‘한서지리지’는 까마귀법도(팔조법금)를 무시[犯]하였다고 조롱한다.

이제 다시 고대사논쟁을 성찰하라. 열하일기 6월 28일자 일기에서 연암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를 한탄한다. 그러나 유심히 읽어보면 연암은 타인들의 역사책 『구당서』『한서지리지』 등에 의지하여 어렵지 않게 영토를 알려준다.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의 안시성은 중국이 봉황성이라고 칭한 그 자리에 있었다고. 고조선의 경계를 증언하는 평양은 평안도 평양이 아니라 봉황성 서쪽 500여리에 있었던 ‘기자箕子의 평양’이라고.[평양을 재고하였다는 점은 ‘유사사학’의 공이지만, 한민족이 중화문명의 창조자라는 이야기는 중화주의에 낚인 바보 같은 주장이다.] 그러면 연암이 진정 한탄한 것은 무엇인가? 까뮈의 ‘이방인’을 환기하라.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까뮈가 엄마(근본)의 죽음조차 망각한 현대인을 한탄하듯이, 연암이 한탄하는 것은 공작새를 모방하다 자아를 잃어버린 까마귀인간이며, 그 상실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조선의 역사학이다. 광활한 영토만 자랑하며 함께 살았던 민족(여진 말갈 거란 등)을 오랑캐라고 손가락질해온 우리들이다.
고대사논쟁을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다. 기억하시라. 3천년 전 기자조선이라는 역사를 조작한 주나라의 동북공정을, 2천년 전 우리를 ‘낙랑樂浪’했던 한나라의 동북공정을. 공작새선비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중화주의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투쟁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혼(홍익인간과 삼족오)을 기억하지 못하는 몽매한 역사학을.

※다음 편: 광개토왕릉비의 비밀
고대사논쟁을 촉발시킨 또 하나의 계기인 일본의 팽창주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왜 ‘임나일본부설’따위에 놀아났는지 광개토왕비를 기대하시라. 모방[倭]하는 우리, 인간을 포획[倭]하고 고구려를 포위[倭]하는 중화를 바라보지 못하고, 중국의 평양平壤과 고구려의 평양平穰의 차이를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벌어진 슬픈 역사학의 역사를.

       



MK 우측 중단 광고 0
이전 배너 다음 배너

분야별 주요뉴스

포토

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