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자격증과 실종된 자격정책

매일경제가 지난 DJ 정부 시절 지식혁명, 학습혁명 캠페인을 통해 우리나라 언론의 공론 형성 기능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던 것을 기억한다. 현 시점에서 매일경제가 기획기사를 통해 자격제도 문제를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과거의 성공적 캠페인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매일경제가 이 문제를 화두로 삼아 지식기반사회로의 진입을 위한 새로운 공론 형성을 선도하기 바란다.
과거 우리 60년대에 전기기사, 전자기술사, 무선통신사 등의 자격 취득 열풍이 불면서, 이를 위한 전문잡지, 학원 등이 융성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또는 독학으로 자격증 취득을 위한 전자■통신 기술의 공부와 토론에 매달렸으며 사실 우리나라의 성공적 산업화나 지금의 전자■반도체 산업의 세계적 경쟁력의 기반은 그 때 형성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재, 성공적인 취업을 간절히 원하는 젊은이들에 있어 미래의 고용주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역량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은 더할 나위 없이 크다. 갈수록 빈번이 주장되는 라는 구호가 이들의 초조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들이 학교의 정규교과 보다 자격증 취득을 위한 시험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이를 겨냥한 각종 자격증 사업과 그 부대사업이 번성하고 있다.
반면에, 정작 이들을 채용할 기업들은 그 넘치는 자격증들에 별다른 신뢰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왜 일까.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기업들은 인적자산을 포함하여 그 보유한 자산의 구체적이고도 진정한 우수성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다. 경제학자들을 이를 이라 부른다. 특용자산이란 자신만이 알아보고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영업비밀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기업들에게는 그 경쟁력의 원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쉬운 말로 를 구현하자고 내세우지만 사실 이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추상적 실체이다. 따라서 이를 눈에 보이게 하는 간편한 를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유통시킬 필요가 생긴다. 자격제도가 바로 그 것이다. 반면, 이러한 필요와는 달리 중요한 능력들은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독점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기업 측면의 요구가 상당히 높다. 이 측면에서 보면 자격제도는 기업의 현실적 관심과 충돌하는 경향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충돌되는 요구를 조화시키고 사회 전체적인 발전을 제도적으로 강구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자격정책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격과 자격증은 지식기반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인적자산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시장을 통해 교환되고 거래되도록 함에 있어 결정적인 제도이다. 이는 시장에서 화폐가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 거래를 위해 핵심적 매개 기능을 수행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현상이다. 화폐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신용사회를 전제로 한다. 자격과 자격증도 마찬가지다. 신용을 기반으로 자격과 자격증이 유통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격제도는 산업화 초기에 정부가 주도하여 국가자격제도로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인력을 개발하고 산업화에 성공한 모범사례가 우리나라였다. 지식기반경제의 도래와 함께 겨우 선진국 문턱에 선 우리나라로서는 여전히 인적자원의 우수성만이 산업화를 넘어 선진화의 길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자격과 자격증은 보이지 않는 지식과 역량, 학습성취를 눈에 보이게 하는 지식화폐, 학습화폐의 제도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자격제도-바꾸어 말해 우리나라에서 발급되어 전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우수한 바로 그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이에 눈을 돌리기 전에 먼저 이 분야를 선점해야 한다. 교육개혁 차원에서 1997년에 제정된 자격기본법은 시장메카니즘을 통해 이를 성취하기 위한 자격의 기본질서를 천명한 법률이다. 이 법의 시행 후 벌써 1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또한, 새로운 자격제도 하에서 무질서하게 번성하는 민간자격증들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끊임없이 출현하는 민간자격들로 인해 비로소 과연 어떤 능력과 역량 지식들이 새롭게 요구되고 있는지 확실한 시장신호가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격기본법 제정 당시 기대되었던 성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것이었다. 이 점에서 많은 혼란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법제사에서 자격기본법 제정은 중요한 진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민간사업자가 하든 정부나 공공단체가 하든 신규자격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며 시장에서 성공하는 자격증으로 발전시켜 가는 표준화된 절차와 과정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지금의 혼란의 근본 원인이다. 비교적 단순한 경제, 사회 체제를 꾸려 왔던 우리나라의 제도는 오랫동안 실체법규 중심의 사고에 젖어 운용되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선진제도는 절차 중심으로 운용되는 것이다. 자격제도의 신용과 통용력은 절차를 통해 얻어지는 신용에 의해 담보된다. 매일경제의 자격캠페인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혁명, 학습혁명 캠페인에 이은 효과적인 선진화 캠페인으로 지속되기를 빈다.

정기오 한국교원대 교수■교육정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