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의 최고 수뇌님께 보내는 편지-

김정일 님께.

김정일 님.
저는 김정일 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모릅니다. 최고의 존칭을 써야하는지, 그리고 지금 당장은 하대를 하며 제 의견을 전해야 하는지, 우선 저는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을 때부터 그런 등등이 막막했습니다.

우리 동방예의지국의 관습으로는 김정일 님은 분명 한 나라의 수뇌이고 세계에서도 몇 안 되게 일인치하를 거느린 권력자시니 한도 껏 예우를 갖춰 호명해야 한다는 정도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경색된 현 사회구조에 대해 아는 만큼 불필요할 정도로 몸이 사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저는 반미주의자도 친미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냥 허접스레 읊어대는 민족주의자도 아닙니다. 누가 그랬지요? 세계에서 민족주의자가 모두 죽어 사라지기 전에 평화는 오지 않는다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초 본능적으로 그냥 평화를 추구하는 발본주의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제가 몸담아 왔던 나라에서 잘 길들여진 애완용 강아지처럼 말 하란다면 반공주의자 정도는 되야겠고, 또 그렇습니다.

저의 반공주의는 사실 길들여진 것은 아닙니다. 초 근본적인 원인에 의해, 그것은 제가 목격하고 겪은 바에 의해 단순한 어린 시절부터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싹이 터서 굳어진 고정관념의 일종이랄까 하는 그런 겁니다.
이념이 뭔지, 공산주의 정치행동 원칙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장점이나 단점이 뭔지 전혀 모르는 어린 나이에 6.25 사변을 만났고, 저는 아버지가 옷장 속에 동굴을 파고 그 안에 숨어 계시다 무더기로 조준이 되고 있는 따발총 군에게 고꾸라지고 엎어지시면서 이끌려 가시는 걸 보았습니다.

앞집에 사는 의학박사 최영욱 님은 1년 전에 미국에서 돌아오셔서 서석병원을 개업하셨는데 아버지와 함께 끌려가시는 걸 보았고, 다른 한 분 호남갑부 최 모 님과 세 분이 어느 학교의 교실에서 매 맞으며 뒹굴다 다시 밀려들어오는 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북으로 후퇴를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자 두 분은 대창으로 살해되고 저희 아버지만 옷고름도 없는 동저고리 바람으로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두 분이 뾰족하게 깎아 흉기로 사용되고 있던 대창에 가슴이 찔려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로부터 들었지만 끔찍하다는 생각 밖에 어린 가슴에 반공이 싹튼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머니를 잃고 세상에서 끔찍이도 사랑하며 따르던 오빠가 서울의 용산부대에서 전사했다는 통지를 뒤늦게 받고부터였습니다. 저의 원한은 하늘에 닿을 정도였고 그 때부터였습니다. 공산주의라는 것에 대한 흑백론이 성립이 된 거지요.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사실 하나가 대두되었습니다.
세 분의, 아버지와는 절친한 바둑친구이고 친 형제처럼 가까웠던 최영욱 씨와 호남 갑부였던 최모씨가 대창으로, 사형집행이 되어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만 왜 혼자서 살아 집에 돌아오실 수 있었을까, 참으로 묘한 인연의 대칭적 발상이랄까,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경상도 분으로 재정이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금광을 하셨는데 전라도에 15군데나 진짜로 노다지광이었던 광산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의 산물이나 처럼 지방관청의 높으신 분들과 교류가 잦았고 판검사를 손에 쥐고 흔든다는 말까지 나돌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늘 옆에 계시며 지금으로 말하면 비서나 보좌역이랄까, 하여간 친 형제 친 아우 같은 분이 예셨습니다. 두 분은 단 하루도 서로 얼굴을 안 보면 큰일 나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냥 어린 저희들로부터 ‘영낙이 아저씨’로 불리면서 아버지의 온갖 시중을 들고 어딜 가자면 앞장서 나서고 저 만큼, 물렀거라 김 주사님 나가가신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또가 행차 시에 길 닦는 관리처럼 행동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분이 찾아와 무작정 방성대곡을 하는 겁니다. 듣고 보니 빨갱이로 활약을 하던 아우가 지리산에서 붙잡혔는데 제발 자신의 단 하나 혈육인 아우 놈을 살려달라는 겁니다.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의 오열과 몸부림은 저마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영낙이 아저씨가 말하는 하나뿐인 아우를 살려내셨습니다. 돈의 세도가 막강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검사까지도 절절 긴다고 하는 아버지로부터 크게 은혜를 입은 영낙이 아저씨 동생은 자유의 몸이 되자 어디론가 곧장 사라져버렸습니다.

6.25 사변이 터지고, 아버지가 잡혀 가시고, 그때까지 이미 타계한 영낙이 아저씨의 빨갱이 아우는 저희 가족의 아주 잊혀진 인물이었습니다. 아주 까맣게. 그러다 수년이 지난 아주 먼 훗날, 7월 중순께였을 겁니다.

아버지가 인민군 지서로부터 관리되고 있는 초등학교 교실에 갇혀 취조를 당하고 계셨는데 인민 보위부라나 하는 곳의 아주 높은 사람이 그냥 지나쳐 가며 지서를 시찰하던 중에 잡혀 와 있는 반동분자들의 명단을 훑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 겁니다.

그가 아버지를 찾아 감방으로 쓰이고 있는 교실에 나타났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는 살아생전 은혜입어 전전긍긍 몸종이나 처럼 헌신했던 영낙이 아저씨의 못된 빨갱이 아우 놈(영낙이 아저씨가 생명의 은인에게 인사도 없이 사라진 자신의 아우를 언제나 그렇게 말했음)과 만난 것입니다.

짐승도 자기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을 안다니까 그 역시 은인을 살려낼 의무감 정도는 지니고 있었나 보다고, 그렇게 아버지는 살아 집에 오셨던 겁니다. 영낙이 아저씨의 으로 인해 이념의 희생물로 대창에 찔려 세상을 하직하실 뻔 했던 것을 그러지 않아도 되셨던 겁니다. 바로 여기에 저의 영원한 수수께끼는 싹트기 시작한 겁니다.

저는 언필칭 문학소녀로 초등학교에서부터 이름이 날렸을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인가, 국군장병에게 의무적으로 쓰고 있던 위문편지가 나달나달해서 교장선생님께 되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너무나 명문의 글이라 학교로 다시 보낸다는 전언과 함께였습니다. 온 장병이 다 읽고 보내느라 그토록 제가 보낸 위문편지가 나달나달 했다니까요. 그 편지의 내용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저희 집에서 기르던 메리라는 세퍼트의 얘기였습니다. 메리는 인민군이 밀어닥친 저희 집 대청마루 밑에, 아버지가 숨어 계시던 장롱(아래쪽 바닥을 파서 움으로 만든 피신처)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게 발각됐습니다.

그 개는 그냥 개가 아니라 저희 집 가족이었고 아버지는 그 개에게 주기적으로 육회를 먹이며 애지중지 하기를 자식 대하듯 하셨는데 단 한마디로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눈앞에 육회 접시를 놓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먹으라는 말이 떨어질 때까지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정도로 잘 훈련된 개였습니다,

인민군이 그 개를 끌고 갈 때 하필이면 제가 도와야 했습니다. 인민군이 그 개를 발견해서 대청마루 깊숙한 곳에서 이끌어내도록 저를 시킨 겁니다. 저는 위협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민군이 들고 있는 따발총으로 그냥 갈겨버리겠다는 말에, 조용히 나오게 하면 데려다 자기들이 기를 거냐고 묻는 제 말에 그들이 그렇다고 했기 때문에 그 개를 나오게 한 겁니다.

대청마루 깊숙한 곳에서 나와 목과 어깨를 한껏 낮추며 저의 등 뒤에 숨었습니다. 그런 메리의 목에 끈을 매어 이끌고 시냇가로 갔는데 저보고 시냇가의 전봇대를 고정시킨 쇠줄에 개의 목에 걸려 있는 끈을 매어놓도록 시켰습니다. 저는 그대로 했고 이젠 됐으니 넌 가라는 말을 들으며 돌아서서 터벅터벅 두어 걸음 옮겨 놓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이제껏 조용하기만 했던 메리가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늘에 대고 울부짖듯 짖어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저는 귀를 막은 채 앞으로 내달았습니다. 그 엄청난 굉음! 꽝! 그리고 케겡--! 그렇게 메리의 최후가 끝난 겁니다. 그 때의, 아버지마저 잡혀가시고 난 후의 인민군에 대한, 공산주의에 대한 하늘을 찌를 듯했던 증오와 염오의 감정이 국군장병에게 보낸 그 위문편지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국군 아저씨! 메리의 원수를 갚아 주세요. 그런데⋯⋯.

그런데 바로 그것이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이후의 영원한 수수께끼와 뒤범벅이 될 때의 심정을 저는 또 위문편지에 썼고, 그것이 실은 지금도 제 가슴속에 이율배반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살아 오셨거든요⋯⋯. 하지만 우리 오빠!

그렇게 된 겁니다. 제 가슴에 남아 있는 슬픔과 유사한 슬픔이,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슬픔 등이 김정일 님의 가슴에도 비 오는 날, 또는 흐리거나 맑은 날 꿈틀거림으로 남아 눈앞을 흐리게 하는 때가 종종 있으시리라 봅니다.

김정일 님의 일인치하에서 가엾은 인민이 배고파 죽어갈 때 그리고 죽어갔을 때, 태연한 척 아무도 모르게 홀로 가슴 부등켜 마음으로만 슬피 우시기도 할 겁니다. 그런 당신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사회의 끝없는, 알베르 까뮤가 말한 저 세계의 부조리, 바로 그런 데에 얽혀있는 대칭적 요소가 아닐까요?

인간의 삶에 대해 저는 아주 많이 생각합니다. 어디서 왔는가, 무엇을 하다 왔는가. 거기에 저는 인간이란 자체가 어느 행성에서 죄를 짓고 이승이라는 감옥으로 수감되어 왔을 거라는 생각을 아주 많이, 그리고 자주 합니다.

절대로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이승의 죄수가, 수감자들이, 온전한 행복 가운데 여흥을 즐기도록, 어느 간수들이 그냥 지켜만 보겠는가고. 모범수로 조금 누리게 하다가 어떤 방법으로든 고통으로 바꾸어 놓는 그런 것이 저승의 이승에 대한 징계의 방법 아닐까,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 거라는 생각을 아주 많이 합니다.

중국 속담에 좋은 일 있어도 하늘을 보며 웃지 말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하늘이 시샘을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이승에서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우리가 수감된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그 자체가 죽음인 것을, 남남갈등, 북북갈등, 남북갈등 북미, 한미, 동서양 갈등 등⋯⋯. 하물며 신을 숭앙하는 자들의 종교적 갈등까지, 온통 갈등 속에 수수께끼를 풀어 갈 시간마저 잃어가는 우리들!

이제 그만, 본론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엊그제 판문점을 통해 로 남한에 전해져 왔다는, 사단법인[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모임] / [한반도평화탑]건립추진위원회가 자유로에 큰 광고판을 내 걸고 그곳에 !라고 쓰인 글자 중에 6.15공동성명을 저해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며 철거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에 대해서, [한평추]가 금년 정월 초하루와 초이틀에 임진각에서 !!!!!!!!